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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4월 30일 포뮬러 원에서는 폴 리카르드 서킷에서 진행되던 테스트 세션 도중 엘리오 드 안젤리스(Elio de Angelis)가 목숨을 잃은 1986년 5월 이후 첫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롤랜드 라첸버거(Roland Ratzenberger)가 산 마리노 GP 예선 도중 사망한 것이다.
롤랜드 라첸버거는 24시간 뒤 아일톤 세나가 사고사한 탐부렐로(Tamburello) 코너를 빠져나와 시속 332km로 질주하고 있을 때, 자신의 심텍 머신 프론트 윙이 부러지는 바람에 빌르너브 커브의 콘크리트 벽에 강하게 충돌했다.
라첸버거의 죽음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자신보다 훨씬 인기가 많았던 동료 드라이버의 죽음에 가려졌다.
매년 5월 1일이 되면 사람들은 위대한 브라질인 F1 드라이버 아일톤 세나를 떠올린다. 하지만 라첸버거는 당시 세나가 사고사하기 전까지 침울했던 이유를 설명될 때나 가끔 이름이 언급될 뿐이다. 사망 직후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나는 그때 이미 F1 최고의 스타 드라이버였지만 라첸버거는 루키였다. 그런 세나의 장례식엔 3백만명이 운집한 반면에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가진 라첸버거의 장례식에는 250명 밖에 참석하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입문한 F1에서 단 세 번째 경기를 치르다 사망한 33세 오스트리아인의 장례식을 찾은 드라이버는 4명 뿐이었다.
“롤랜드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조니 허버트는 포뮬러 포드 페스티벌에 함께 참가한 1985년 이후 라첸버거와 사이가 두터워졌다. “지금도 그가 그립습니다. 유럽 레이스가 펼쳐질 때면 특히 생각나는데, 모나코가 항상 그렇습니다.”
“그가 죽기 1년 전, 우리는 그곳에서 훌륭한 식사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 무렵 그는 F1에 진출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는 좋은 친구였고, 서로의 꿈에 대해서도 자주 얘기를 나눴습니다. 제가 먼저 F1에 진출했는데도 무척 행복해보였고, 마치 자신의 일인냥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1994년, 라첸버거의 사망 사고에 아일톤 세나는 몹시 괴로워했다. 그리고 24시간 뒤,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파손된 세나의 윌리암스 머신 콕핏에서는 오스트리아 국기가 발견되었다.
references. Carscoops/photo. formula1